채식과 육식 그리고 깨달음

by flowerrain posted May 21,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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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쇼 라즈니쉬】 채식과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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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금강경 (Vajrach-chedika Prajna-paramita Sutra)

 

 

 

【 QUESTION 】 왜 당신은 아쉬람(명상 공동체) 내에서 육식을 허용하지 않습니까..?

【 ANSWER 】 이것은 ‘스와미 요가 친마야(Swami Yoga Chinmaya)’가 한 질문이다.

 

친마야의 마음속에는 고기를 먹고 싶은 생각이 있음에 틀림없다. 깊은 곳에 폭력성이 숨어있음에 틀림없다.

그렇지 않으면 채식주의자인 그가 이런 질문을 할 리가 없다.

이곳(O.I.M.C. Osho International Meditations Commune 오쇼 국제 명상 코뮨)에는 육식 을 하는 사람들이 수천명이나 된다. 그런데 오히려 채식주의자인 친마야가 이런 질문을 했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이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이다. 사실 채식주의자는 진정한 채식가가 아니다.

그는 단지 육식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고 있을 뿐이다. 억눌린 욕망은 반드시 다시 일어나기 마련이다.

내가 아쉬람 내에서 육식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는 종교적인 것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그것은 순전히 미적(美的)인 이유 때문이다! 나는 육식을 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예수가 깨달았고 모하메드가 깨달았다. 라마 크리슈나도 깨달았다. 육식을 해도 깨닫는데에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그대는 육식을 해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육식에 관해서는 종교적인 문제가 없다.

내게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미적(美的)인 측면이다.

 

예수는 계속 고기를 먹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나는 그에게 심미적인 감각이 없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가 종교적이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철저하게 종교적이다. 붓다만큼 종교적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무엇인가 빠져있다. 라마 크리슈나는 계속해서 생선을 먹었다. 그것은 심미적(審美的)이지않다.

 

다소 추해 보인다! 육식을 해도 깨달음에는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그대의 시적(詩的)인 감성(感性), 미적인 감각이 위태로워진다. 그대의 인간다움이 위태로워진다.

 

그것이 내가 아쉬람에서 육식을 허용하지 않는 이유이다.

앞으로도 육식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아름다움의 문제이다. 이것을 이해하면 많은 점이 분명해질 것이다.

 

이 아쉬람에서 술(酒)은 허용될 수 있다. 그러나 고기는 안된다. 술은 채식이다.

술은 과일즙이다. 발효되긴 했지만 어쨌든 과일즙이다. 그리고 때로는 약간의 술이 위대한 시(詩)를 낳기도 한다.

 

그것은 가능한 일이다.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새로운 공동체에서 우리는 「오마르 카이얌(Omaya Kayam)」 이라는 이름의 술집을 가질 것이다.

 

※ 역주 ※

오마르 카이얌(Omar Kayam)

페르시아의 시인, 천문학자, 수학자. 대표적인 저서로 '루바이야트'가 있다.

그리고 오쇼의 아쉬람에서는 대부분의 건물에 영적으로 위대한 일을 한 사람들의 이름을 빌어 명칭이 지어졌다.

 

오마르 카이얌은 사실 수피(Sufis: 이슬람 신비주의)의 성자이며 깨달은 자다.

그러나 고기는 허용될 수없다. 그것은 추한 일이다. 먹기 위해 동물을 죽인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아름답지 못한 일이다.

 

나는 동물이 죽음을 당하는 것이 가엾어서 육식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동물 안의 본질적인 것은 살아남을 것이다.

 

본질적인 그것은 죽일 수 없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부분, 몸체는 그대가 죽이든 죽이지 않든 언젠가 죽을 것이다.

 

그러므로 동물의 죽음에 대한 문제는 내게 있어서, 고려해야할 초점이 아니다.

동물을 죽인 행위가 옳다 혹은 옳지 못하다는 점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동물을 죽인 사람이 왜 하필 그대인가 하는 점이다.

 

단지 먹기 위해??? 얼마든지 채식이 가능한데도???

만일 먹을 식물이 없다면 그것은 육식의 이유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먹을 수 있는 식물은 얼마든지 널려 있다.

 

그렇다면 왜? 왜 살아있는 몸을 파괴하는가?

만일 그대가 동물을 죽일 수 있다면 왜 식인종이 되지 않는가? 인간도 동물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엇이 나쁜가? 인간의 몸으로 만든 고기가 더 맛있을지도 모른다.

 

왜 인간을 먹지않는가? 그것 또한 미적인 문제이다. 동물은 우리의 형제이며 자매이다.

그대가 느낄지 몰라도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다. 인간을 죽이는 것은 단지 좀더 진화된 동물을 죽이는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동물을 죽이는 것은, 진화 과정에 있긴 하지만 아직 충분히 진화하지 못한 누군가를 죽이는 것이다.

 

초등학교 일학년에 다니는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과 대학 졸업반 학생을 죽이는 것이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똑같은 행위다. 동물은 인간으로 진화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도 한때 동물이었다.

왜 그대의 부인을 죽여서 먹지 않는가? 그녀는 너무나 아름답고 달콤할텐데!

 

어떤 사람이 식인종 친구를 만나 음식을 대접 받았다. 그는 그토록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으리라곤 꿈도 꾸지 못했었다. 떠날 때가 되었을 때 그가 식인종에게 물었다.

 

 

“ 이 음식은 기가 막히군.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야!

다음에 올 때에도 똑같은 음식을 먹을 수 있을까? ”

 

식인종이 말했다.

 

“ 그것은 좀 곤란하네. 내겐 엄마가 한명밖에 없거든! ”

 

그대는 왜 남편이나 아이를 먹지 못하는가? 그리고 육식은 결코 종교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미적인 문제이다. 나는 이 점을 다시 한번 상기시키고 싶다.

 

심미적인 사람은 삶이 아름답게 유지되는 것을 볼 것이다. 그의 눈으로 볼때, 삶은 추하거나 악몽처럼 변질되지

 

않는다. 그런데 친마야의 마음 속에는 의문이 떠올랐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

인도의 수많은 채식주의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채식가가 아니다.

그들이 채식주의자가 된 것은 단지 채식주의 가정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주 어릴때부터 채식주의를 강요당했다. 자연히 그들은 다른 음식에 대해 호기심이 생기고 맛보기를 원한다.

이런 생각이 머리에 떠오를 것이다.

 

《온 세상이 육식을 하고 있다. 사람들은 육식을 통해 어떤 즐거움을 얻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래서 채식주의자는 자신이 많은 것을 놓치고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육식에 관한 의문이 떠오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육식은 명상과는 무관하다. 그대는 고기를 먹으면서도 명상할 수 있다.

육식을 하면서도 사랑할 수 있다. 육식은 사랑과 무관하다.

그러나 육식을 함으로써 그대는 자신에 관한 어떤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그것은 그대가 미개하고 원시적이며 문화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채식주의는 원래 심미적인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우연히 종교에 유입되면서부터 그런 심미적인 인식이 실종되어

 

버렸다. 오히려 채식주의는 종교적 의미를 띄게 되었다.

가끔 사람들은 내게 와서 육식에 대해 묻곤 한다. 한번은 어떤 자이나교인이 내게 물었다.

 

“ 당신은 예수가 깨달았다고 말하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는 육식을 했습니다! ”

 

그가 이렇게 묻는 것은 당연하다. 왜냐하면 그는 육식가는 깨달을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식가도 깨달을 수 있다. 시인이 아닌 사람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육식가도 깨달을 수 있다.

 

육식은 장애물이 아니다.. 미적감각이 없는 사람들, 장미꽃에서 어떤 아름다움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도 깨달을 수 있다.

 

베토벤의 음악에서 아무 감명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도 깨달을 수 있다.

그리고 예수는 무언가 투박한 면을 보여준다. 아마 그에게는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모두 육식가인 사람들 틈에서 살았을 것이고, 그안에서 채식주의자가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접근 방식은 『전체적(totally)』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나의 접근 방식에는 명상, 시, 미학, 종교, 음악, 예술이 필요하다. 인간은 다양한 차원에 걸쳐 「전체적」으로 발전해야 한다.

 

그래야 궁극적인 개화(開花)가 일어난다. 그때에는 그대의 꽃잎 전부가 활짝 피어난다.

그리고 그대는 삶에서 더 큰 기쁨과 더 큰 은총을 맛볼 것이다.

성 프란시스(St.Francis: 이탈리아 출신의 기독교 신비주의자)는 예수보다 훨씬 더 심미적이었다.

 

새들이 날아와 그의 어깨 위에 앉고, 물고기가 그를 보기 위해 강에서 뛰어올랐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는 동물들과 대단히 친밀했다. 그는 나무, 새, 태양, 달과 이야기했다. 그는 그들을 형제-자매라고 불렀다.

 

예수와 모하메드에게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일어날 수가 없다.

나는 그들을 깨달은사람들이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는 무엇인가 빠져있다. 그것은 심미적인 감수성이다.

 

왜 그것을 놓치는가? 왜 깨달음의 세계 전부를 취하지 못하는가?

왜 가능한 모든 면에서, 그대의 전체성(totality) 안에서 누리지 못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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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의학(medicine; medication)은 명상(meditation)이란 단어에서 유래되었다.

약·의학은 육체를 치료하고, 명상은 육체와 영혼 둘다 치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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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식은 독(毒)이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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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라즈니쉬의 명상건강 (From Medication To Meditation)

 

 

 

… … (중략) … … 이젠 과학자들도 동물을 죽일 때 그 동물이 공포 때문에 온갖 독소가 분비된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죽음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대가 동물을 죽일 때, 동물의 내부에서는 공포로 인해 엄청난 떨림이 일어난다. 동물은 살아남기를 원한다. 그래서 온갖 종류의 독소를 뿜어내는 것이다. 그대 역시 공포를 느낄 때는 몸 안에 독소가 분비된다. 이 독소들은 그대가 싸우거나 도주하는데 도움이 된다. 때때로 화가 나면 그대는 상상하 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평상시 흔들지도 못했던 바위를 옮겨 놓을 수가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분노가 있고 독소가 퍼지고 있다. 공포로 인해 사람들은 올림픽 육상 선수도 앞지를 수 있을 만큼 빨리 뛸 수도 있다. 누군가가 그대를 죽이기 위해 칼을 들고 뒤쫓아오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그대는 그대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대의 온몸은 최대한으로 작동될 것이다. 그대가 동물을 죽일 때, 이와 같은 분노와 불안과 공포가 일어난다.

 

동물의 눈앞에 죽음이 닥쳐오고 있다. 동물의 모든 분비기관에서 수많은

종류의 독(毒)이 분비된다. 그래서 현대에는 동물을 죽이기 전에 무의식적으로 만들고 마취시키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현대의 도살자들은 마취법을 쓴다. 하지만 이것은 극히 표면적인 차이만 있을 뿐, 별 차이가 없다. 마취가 미치지 못하는 가장 깊은 곳에서는 죽음을 대면해야 하기 때문이다. 동물들 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고,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자각하지 못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일은 마치 꿈속에서 처럼 일어나고 있다.

 

동물은 악몽을 꾸고 있다. 그래서 고기를 먹는 것은 독(毒)이 있는 음식을 먹는 것이다. … … (중략) … … 몸은 마음처럼 복잡하지 않다. 몸은 단순한 현상이다. 몸은 쉽게 정화될 수 있다. 만일 그대가 육식을 해 왔다면, 그것은 그만 둘 수 있다. 그것은 그렇게 큰 일이 아니다. 그래서 고기 먹는 것을 중지한다 면 석달 안에 몸은 채식을 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 모든 독소로부터 깨끗이 벗어버릴 것이다. 그것은 매우 간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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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동물에겐 각자에게 알맞는 음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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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라즈니쉬의 명상건강 (From Medication To Meditation)

 

 

 

… … (중략) … … 어떤 동물도 인간처럼 먹지 않는다. 모든 동물에게는 자신이 선택한 음식이 있다. 들소를 정원에 데려다 놓으면 특정한 풀만 먹는다. 아무 것이나 먹어 대지 않는다. 동물들의 식성은 매우 까다롭다. 자신들의 음식에 대해서는 확실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완전히 잃어버려서 자신의 음식에 대해서 확실한 감각이

없다. 그는 계속해서 아무 거나 먹고 있다. 사실 인간이 먹지 못하는 것

은 찾아볼 수 없다. 지구촌의 어떤 곳에서는 개미를 먹고, 어떤 곳에서는 뱀을 먹으며, 또 어떤 곳에서는 개(dog)를 먹는다. 인간은 뭐든지 먹어왔다. 인간은 완전히 미쳤다. 인간은 무엇이 자기 몸에 맞고 무엇이 안 맞는 지 전혀 모른다.

 

인간의 정신은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되어 있다. 인간은 당연히 채식가여야 한다. 몸 전체가 채식을 위한 구조로 만들어졌기 때문 이다. 인간의 전반적인 몸 구조가 육식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는 사실을, 과학자들도 시인했다. 인간은 원숭이에서 나왔다. 원숭이는 채식가이다. 철저한 채식가이다. 만일 다윈의 진화론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채식가여야만 한다. 어떤 종의 동물이 채식가이고 비채식가인지 판단하는 방식은 이렇다.

 

그것은 장(腸)의 길이에 달려 있다. 채식을 하지 않는 동물은 장이 매우 짧다. 호랑이나 사자의 장은 아주 짧은데, 고기는 이미 소화된 음식이기 때문이다. 고기를 소화하는 데 긴 장이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인간이 채식가임을 뜻한다. 긴 장이 필요한 것은 밖으로 쏟아내야 할 배설물이 많기 때문이다. 육식가가 아닌 동물이 계속해서 고기를 먹으면 몸에 부담이 생긴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치아의 구조가 그렇다. 인간의 이빨 모양을 보고, 누가 육식이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인간의 이빨은 자르고 찧을수 있는 모양일 뿐, 호랑이나 사자처럼 뾰족하고 날카롭지 않다. 곡식과 야채는 그런 이빨로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심지어 불(火)에 익히지 않고 날 것으로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고기는 그런 이빨로 먹을 수 없다. 그런 이빨로 고기를 먹으려면 필히 불에 충분히 익혀 부드럽게 만든 화식(火食)이라야 한다.

 

만일 인간이 호랑이나 사자처럼 육식동물이라면 당연히 그의 이빨 모양도 날카롭고 뾰족해야 한다. 이처럼 인간의 몸에 적합하지 않는 음식이 들어올 때, 몸은 무거운 부담을 느끼며 의식적으로는 매우 탁한 상태가 된다.

 

동양의 모든 위대한 명상가들, 붓다나 마하비라도 이 사실을 강조했는데, 그것은 비폭력에 대한 관념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그것은 두번째 문제다. 그대가 진정 명상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면 몸이 가볍고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기 때문이다. 비채식가의 몸은 너무나 많은 짐을 지고 있다. 고기를 먹을 때, 어떤 상황이 벌어지는지 한번 지켜보라.

 

동물을 죽일 때 죽임을 당하는 동물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누구도 죽임을 당하고 싶지 않은 것은 당연하다. 생명은 스스로 오래 살고 싶어한다. 동물은 자진해서 죽으려 하지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는 기꺼이 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사자가 덤벼들어 그대를 죽인다면 그대의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가? 똑같은 일이 사자를 죽일 때도 일어난다. 엄청난 고통, 공포, 죽음, 걱정,불안, 분노, 폭력, 슬픔, … ….

 

이 모든 것이 동물에게 일어난다. 몸 구석구석에 폭력과 걱정과 격통이 스며든다. 몸 전체가 독소로 가득찬다. 동물은 자신의 뜻에 반해 억지로 죽고 있기 때문에 온몸의 분비선에서 독소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대는 그 고기를 먹는다. 그 고기는 동물이 분비한 온갖 독소를 옮긴다. 모든 에너지가 독소인 데, 그 독소가 그대의 몸으로 운반된다. 그대가 먹는 고기는 동물의 몸에 속해 있었다. 그 몸은 특정한 목적을 갖고 있다. 동물의 몸에는 특정한 형태의 의식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동물의 의식보다 높은 수준에 있는 그대가 동물의 시체를 먹으면, 그대의 몸은 아주 낮은 수준으로, 동물의 수준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그대 의식과 몸 사이에 거리가 생겨나고, 긴장과 불안이 따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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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러운(Natural) 음식이란, 그대의 혀(tongue)가 필요로 하는 음식

이 아니라 그대의 몸(body)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뜻한다. 육식은 독이

있는음식을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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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라즈니쉬의 명상건강 (From Medication To Meditation)

 

 

… … (중략) … … 인간은 자연스러운 것을, 그대에게 자연스러운 것을

먹어야 한다. 과일, 콩, 야채는 먹을 수 있을 만큼 먹으라. 이런 음식들의 아름다움은 필요 상으로 먹을 수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모든 것은 항상 만족을 준다. 그대를 배부르게 하고 충분히 만족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대는 충만감을 느낀다. 그러나 비자연적인 것은 결코 만족감을 주지 못한다. 아이스크림을 계속 먹어보라. 그대는 하루 종일 아이스크림을 먹어도 만족하지 못 할 것이다. 실제로 먹으면 먹을수록 더 먹고 싶을 것이다.

 

그것은 음식이 아니다. 그대의 마음은 속임수에 빠졌다. 현재 그대는 몸의 필요성에 따라 먹는 게 아니다. 그대는 단지 입맛때문에 먹고 있는 것이다. 혀(tongue)가 지배자가 된 것이다. ━이것이 수많은 사람들이 채식을 하는 데 어려워하는 근본적인 이유이다.━ 혀가 지배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혀는 위(stomach)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모른다. 혀는 몸에 대해선 아무 것 도 모른다. 혀는 음식의 맛을 느끼는 것이다. 당연히 혀는 어떤 음식이 몸 을 위해 좋은지, 어떤 음식이 안 좋은지 가려 내야 한다. 그게 혀가 할 일 이다. 혀는 문 앞의 경비원일 뿐이다. 주인이 아니다. 만일 경비원이 주인 이 된다면 모든 게 엉망진창이 될 것이다.

 

이제 광고주들은 혀가 속임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코가 속임수에 빠지기 쉽다는 것을 안다. 그것들은 주인이 아니다. 그대는 잘 모를 것이다. 세계적으로 음식에 대한 연구가 계속 되어 왔는데, 그 연구에 따르면 코를 꽉 막고 눈을 감는다면 양파를 먹어도 자신이 무엇을 먹는지 모른다고 한다. 맛의 절반은 냄새로 부터 오므로 코에 의해 결정되고 나머지 절반은 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두가지는 지배자가 되었다. 이제 사람들은 아이스크림이 영양가 가 있으냐 없느냐는 문제가 아니다. 아이스크림은 맛도 있고 화학적 작용 으로 입맛을 만족시켜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머리는 뒤죽박죽이다. 들소보다 더 혼란스럽다. 들소에게는 아이스 크림을 먹으라고 설득할 수 없다. 한번 시도해 보라! 자연스런 음식 … ….

 

내가 '자연스럽다(Natural)'라고 할 때는 그대의 몸이 필요로 하는 것을 의미 한다. 자연스러운(Natural) 음식이란, 그대의 혀가 필요로 하는 음식이 아니 라 그대의 몸이 필요로 하는 음식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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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과 폭력성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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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출처 : 라즈니쉬의 명상건강 (From Medication To Meditation)

 

 

 

… … (중략) … … 호랑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다르다. 호랑이는 아주

공격적이어야만 한다. 만일 그대가 호랑이가 먹는 고기를 먹는다면, 그대는 공격적으로 될 텐데, 어디에다 그대의 공격성을 표현하겠는가? 그대는 정글이 아니라 인간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면 그대는 공격성을

억눌러야만 할 것이다.

 

그러면 악순환이 시작된다. 공격성을 억누를 때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그대가 분노하고 공격적일 때 모종의 독은 에너지가 발생한다. 그 독소는 그대가 정말로 공격적이고 누군가를 죽일 수 있는 상황을 만들어 준다. 그 에너지는 그대의 손(hands)으로 이동한다.

 

에너지는 그대의 이(teeth)로 이동한다. 이 두 지점이 동물들이 공격적으로 되는 곳이다. 인간은 동물의 왕국의 일부이다. 그대가 분노하게 되면

에너지가 발산되는데 그것은 손(hands)과 이(teeth)와 턱(chin)으로 온

다. 하지만 그대는 인간사회에 살고 있으므로 화를 내는 일이 항상 적절

하지는 않다. 그대는 문명세계에 살고 있으므로 동물처럼 행동할 수 없다.

 

만일 동물처럼 행동한다면 그것 때문에 그대는 너무 많은 대가를 치루어

야 한다. 그대는 그 정도 대가를 치룰 만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대는 분노를 손(hands)에 억누르고 이(teeth)에 억누른다. 계속해서 거짓으로 웃음을 지은채 이(teeth)로는 분노를 축적

하고 있다. 나는 자연스런 턱(chin)을 가진 사람을 드물게 본다.

 

사람들의 턱(chin)은 자연스럽지가 않다. 분노가 너무 많이 쌓여 굳어 있다. 턱(chin) 을 눌러 주면 분노가 풀릴 수가 있다. 손들(hands)이 추해지고 사람들이 손(hands)에 너무나 많은 분노를 억누르고 있기에 손(hands)은 우아함과 유연성을 잃었다. 마사지를 깊이 해본 사람들은 사람의 손(hands)을 깊이 만질 때, 손(hands)을 마사지할 때 그 사람이 분노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만일 턱(chin)을 누르면 그 사람은 다시 화낼 것이다.

 

그들에게는 분노가 쌓여 있다. 그것들은 몸 안에 불순물들이다. 그것들은 발산되어야만 한다. 그것들을 발산하지 못하면 몸은 계속 무거울 것이다. 요가(Yoga) 수련은 몸 안에 축적된 모든 독소를 발산해 준다. 요가 운동이 그것들을 풀어 준다.

 

그래서 요가의 몸은 특유의 유연성을 갖고 있다. 요가 수련은 다른 운동과는 전혀 다르다. 요가 운동은 몸을 강하게 만들지 않는다. 반대로 몸을 더욱 유연하게 한다. 몸이 유연하면 그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강해진다. 그대는 더 젊어진다.

 

요가는 그대의 몸이 더욱 부드럽고 더욱 자연스럽게 흘러가도 록 만든다. 몸 안에 일체의 장애가 없다. 몸 전체가 그 자체의 깊은 리듬 속에 유기적인 개채로 존재한다. 그것은 시장의 소음과 같지 않다. 그것은 오케스트라와 같다. 몸 안에 장애가 없고 깊은 리듬이 있을 때 몸은 순수하다. 요가 수련은 더할 나위없이 유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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